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 그리고 몸의 발달은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

by Uzoob 2024. 2. 20.
반응형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

몸의 모든 운동 속에 그리고 모든 표현과 징후 속에는 마음의 목적이 새겨져 있다. 인간이란 움직이는 생명체이며 그 움직임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자기의 눈과 얼굴의 근육 따위를 움직인다. 그의 얼굴은 표현력을 갖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마음에 관한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이 무엇을 취급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마음이 몸을 지배하는지 아니면 몸이 마음을 지배하는지에 대해 수없이 논쟁을 거듭해 왔다. 철학자들도 이 논쟁에 가담하여 이런저런 입장을 밝혀 왔다. 그들은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 부르기도 하고 유물론자라고도 하면서 수많은 논쟁을 벌였다.
그럼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어쩌면 그 의문을 해결하는 데 있어 개인심리학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개인심리학에서 볼 때 우리는 마음과 몸의 상호작용에 관해 진실로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인물의 마음과 몸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만약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못된 토대 위에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도움이 되려는 일에 실패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이론은 명확하게 경험 속에서 우러나야 하고 응용 시험에 합격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서 살고 있으며, 올바른 견해를 찾아내기 위한 최대의 도전을 받고 있다.
개인심리학의 연구 결과는 이 문제에서 야기되는 많은 긴장을 제거한다. 몸과 마음은 각자 따로따로 머물고 있지 않다. 우리는 양자의 상호 관계를 그 전체로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의 생명은 움직이고 있으며, 몸만 발달시켜서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없다. 만일 뿌리가 있어서 한 장소에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는 식물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면 매우 놀라울 것이다.
하지만 식물이 예견을 할 수 있다든가 모든 결과를 앞당겨 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능력은 식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식물에게 있어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곧 그는 나를 밟아 버릴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의 발아래에서 무참히 죽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어떤 이익이 될까.
식물은 뿌리를 내린 곳에서 도망쳐 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움직이는 동물들은 행동을 예견할 수 있으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다. 이 사실로 인해 동물에게는 마음이나 영혼이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자네는 감각을 갖고 있을 테지. 그렇지 않다면 자넨 움직일 수 없을 거야.
- 《햄릿》 제3막 4장 - 

이와 같이 운동의 방향을 예견하는 일은 마음의 중심적인 원리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든 못하든 간에 우리는 마음이 어떻게 몸을 지배하는지 또는 마음이 운동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매 순간 아무렇게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여러 노력을 하기 위한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 운동의 목표를 결정하는 것이 마음의 기능이기 때문에 마음은 생명체 속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몸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 몸은 움직이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먼저 몸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즉,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마음은 육체에게 저 멀리 달까지 움직일 것을 제안할 수 있다. 이때 몸이 한계를 감안하여 균형 잡힌 기술을 발명하지 않는 한 그 제안은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인간은 다른 어떠한 생물보다도 운동을 많이 한다. 손으로 행하는 복잡한 움직임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보다 많은 방식으로 운동할 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의 환경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도 다른 생물보다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예견하는 능력이 가장 고도로 발달해 있다는 것을, 또 인간이 자기의 모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더욱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부분적인 목표를 위한 갖가지 노력들의 배후에 전체를 움직이는 포괄적인 운동 기운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는 인생의 모든 역경이 극복되어 전체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더욱 안전하게 승리하며 부상해 왔다는 느낌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의 모든 운동과 그에 대한 표현들이 정리되고 통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음은 하나의 궁극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강해진다. 몸도 역시 마찬가지다. 몸도 하나의 통일체가 되려고 노력한다. 몸은 생식세포 속에 이미 존재해 있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발달해 가고 있다.
가령 피부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치료하기 위해 몸의 전체 기능이 바쁘게 움직인다. 몸이 그런 여러 가지 잠재력을 발휘할 때는 독단적으로 행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도움을 받아 발달이 이루어진다.
운동이나 훈련, 일반적인 위생의 가치는 이미 입증되어 있다. 그것들이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노력할 때 마음 또한 함께 움직이며 노력한다. 생명이 태어난 날부터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날까지 끊임없이 성장과 발달의 연계가 계속된다.
몸과 마음은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한다. 마음은 동력기와 같은 것으로써, 그 힘으로 몸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잠재력을 끌어내어 몸이 안정되고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움을 준다.
몸의 모든 운동 속에 그리고 모든 표현과 징후 속에는 마음의 목적이 새겨져 있다. 인간이란 움직이는 생명체이며 그 움직임에는 각각의 의미가 있다.
인간은 자기의 눈과 얼굴의 근육 따위를 움직인다. 그의 얼굴은 표현력을 갖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마음이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마음에 관한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심리학이 무엇을 취급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다.
심리학의 영역은 개인의 모든 표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탐구하며 그 사람의 목표를 응시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목표와 비교하는 일에 역점을 두고 있다.
안전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서 마음은 항상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성에 직면한다. ‘이 특정한 점에 있어서 안전한 선’을 측정하고 ‘이 특정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그 목표가 달성되는 일’을 측정할 필요가 생긴다. 물론 여기에서 잘못이 범해질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극히 뚜렷한 목표나 방향 설정이 없다면 여러 가지 운동이란 있을 수 없다.
만일 내가 손을 올린다고 하면 먼저 마음속에 그 운동을 위한 목표가 있어야만 한다. 마음이 선택하는 방향은 얼핏 보기에 해로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방향이 선택된 이유는 마음이 자신의 목적에 합당하고 더욱 유익한 방향이라고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안전이라는 목표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안전의 개념을 잘못 인식하여 우왕좌왕하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우리가 어떤 표현이나 징후를 보고 그 배후에 있는 의미를 인식하여 행한다면,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그 윤곽만 잡고 하나의 간단한 운동으로 환원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훔친다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훔치는 행위는 어떤 사람에게서 그의 소유물을 가져오는 일을 의미한다. 그 움직임의 목표를 생각해 보면 자신을 풍부하게 하며 더 많은 것을 소유함으로써 더욱 평온한 안정감을 갖고자 하려는 일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그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요인은 자기가 빈곤하며 강탈당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음 단계는 이 개인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또 그가 어떤 상황 속에서 강탈당한다고 느끼는지를 알아내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이런 상황을 변화시켜, 강탈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해 올바른 방법을 취하고 적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는 그가 바라는 바를 손에 넣는 방법이 잘못되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알아낼 수가 있다.
우리는 그의 궁극적인 목표를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 목표를 구체화할 때 잘못된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 인간이 그 환경 속에서 만들어 냈던 여러 가지 변화를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우리의 문화는 인간의 마음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룩해 온 모든 행위의 결과이다. 

몸의 발달은 마음에 의해 결정된다

행동이 한 사람의 인생 해석과 연결되듯이 지금 만일 그가 잘못을 수정한다면, 그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모든 행동이 새롭게 표현될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환경과 접촉하고 여러 가지 인상을 받는 것은 육체적 기관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훈련하는 방법을 통해 자기의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자기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고 하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
우리의 행위는 마음에 의해 영감을 받는다. 우리 몸의 발달은 마음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되며 도움을 받는다. 결국 우리는 마음의 목적 의도로 꽉 차 있지 않은 인간의 표현을 단 한 가지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마음이 자기의 역할을 과시할 정도로 강조하는 일은 결코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역경을 극복하려 한다면 신체적인 능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이 보호될 수 있도록 환경을 다스린다. 우리의 몸을 병과 죽음, 파괴, 사고, 기능장애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마음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은 쾌감이나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공상을 하기도 하며, 좋거나 나쁜 상황들과 자신을 동일화하기도 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해 존재한다. 몸이 여러 가지 느낌을 갖는 이유는 이러한 반응에 의해서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정리해서 알도록 하기 위함이다. 공상이나 자기 동일화는 예견의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느낌은 몸의 반응과 함께 이루어지는 모든 감정을 북돋운다. 한 개인의 여러 감정을 통해 우리는 그가 삶에 부여하는 의미와 목표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감정은 인간의 육체를 통제하지만 육체에 크게 의존하지는 않는다. 감정은 주로 그의 목표와 나란히 그의 일관된 인생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개인은 인생의 방식에 의해서만 통제받지도 않는다. 그 사람의 태도는 다른 것들의 도움 없이 혼자 저절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태도가 직접적인 행위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감정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인심리학의 입장에서 새롭게 관찰된 바에 따르면 개인의 여러 가지 감정은 그가 가진 인생 방식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목표가 있는 곳에서 감정은 언제나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스스로를 적응시킨다. 우리는 그 일을 생리학이나 물리학의 견지에서 설명할 수 없다. 여러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화학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으며 화학적 검사에 의해서 예고되지도 않는다.
개인심리학에서는 생리학적인 모든 과정들을 고려해야 하지만 우리는 심리학적 목표에 보다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불안의 감정이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에 영향을 주는 데 대하여 우리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불안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이 핵심이다.
이러한 접근 방법을 통해서 볼 때 불안은 억제된 성욕에서 생기는 것이라든가, 두려운 출산 경험의 결과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와 같은 설명은 걸맞지 않다.

우리는 어머니와 항상 가까이 있으며 도움을 받고 지지를 받는 데 익숙해져 있는 아이라 할지라도, 불안의 감정을 자신의 어머니를 지배하기 위한 매우 유효한 무기로 생각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분노에 관한 육체적 서술로도 기존의 설명은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분노가 어떤 사람 혹은 상황을 지배하기 위한 보조 수단임을 알게 되었다.

이것만이 유일한 심리학적인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모든 개인에게 있어서, 감정이 그의 목표 달성을 위한 본질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거나 또는 그에 대응해서 좌우되고 발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용기, 쾌활함이나 슬픔은 그의 인생관과 일치한다. 거기에 비례하여 드러나는 모든 감정의 힘이나 지배는 정확하게 우리가 예견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고 싶다는 목표를 슬픔을 통해 달성하는 사람은 결코 유쾌할 수 없으며, 자기가 다다른 상황에 만족하지도 못한다. 그는 자기가 비참할 때에만 행복한 것이다.

우리는 또 여려 가지 감정이 필요에 의해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광장공포증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환자는 자신의 집에 있을 때에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모든 신경증 환자는 자기들이 강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생활의 모든 부분을 외면한다. 그가 느끼는 정서는 인생 방식과 같이 고정되어 있다. 그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과 있을 때에는 거만하게 굴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 의해 보호되고 있을 때에는 용감하게 보이기도 하는데, 그는 자기 세계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사나운 개나 함정과 같은 것으로 대비하며 자기는 용감하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의 불안감을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방법을 아낌없이 이용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그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성애(性愛)의 영역도 똑같은 증언을 준다. 성에 관한 모든 감정은 항상 다른 사람이 자기의 성적 목표에 가까워지기를 바랄 때에 나타난다. 그는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자신의 목표에 모순되는 모든 과거나 상반되는 관심을 외면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감정이나 기능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이나 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고 부적절한 과제나 관심의 배제를 거부하게 되면 조루, 성도착, 불면증과 같은 증상이 생겨난다.

그처럼 정상적이지 못한 성향은 언제나 우월하고 싶어 하는 잘못된 목표나 잘못된 인생 방식에 의해 유발된다. 그런 사람들은 타인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배려받기를 원하고 사회 감정이나 용기가 결여되어 있으며, 여러 낙천적인 활동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와 관련한 한 예가 있다. 차남인 한 남자가 피할 수 없는 죄책감으로 몹시 심각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나 형 모두 정직함을 매우 숭상하는 집안이었다.

그는 일곱 살 때 학교 선생님에게 형이 어떤 숙제를 대신해 주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소년은 죄의식을 3년 동안이나 숨기고 있다가 결국 선생님 집을 찾아가서 자신의 '엄청난' 거짓을 고백했다. 선생님은 단지 웃었을 뿐이다. 이어 아버지에게 간 그는 울면서 두 번째 고백을 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자식이 진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용서를 받고도 소년은 여전히 우울했다.

우리는 이 소년이 사소한 일을 갖고 그 정도로 심하게 자신을 책함으로써. 자기의 성실성과 엄격함을 증명하는 데 오로지 마음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가정의 엄격한 도덕적 분위기는 소년이 정직함에 있어서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인식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학업과 사회성에 있어서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의 부정행위를 고백하고 정직성을 인정받음으로써 우월성을 획득하고자 했다.

그는 나중에는 다른 비난으로 고통받아야 했다. 학교에서 커닝을 전혀 안 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죄책감은 항상 시험을 보기 전에 심해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는 이런 형태의 곤란함을 점점 더 심하게 느끼게 되었다. 민감한 양심 때문에 그는 형보다 더욱 무거운 짐으로 괴로워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형과 같아지려고 함으로써 맞이하게 되는 모든 실패에 대한 좋은 변명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대학을 중퇴했을 때 그는 기술 관계의 직업을 가지려고 계획했다. 그러나 내면의 협박적 죄의식이 너무나 심해졌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도무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어져 버렸다.

당시 그의 상태는 매우 나빳기 때문에 결국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다. 치료될 수 없다는 진단이 나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가 좋아져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만일  재발해서 곤란을 겪게 되면 다시 입원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뒤 직업을 바꾸어 예술사를 공부했다. 이윽고 시험을 치를 때가 다가왔다. 공휴일에 그는 어느 교회에서 갑자기 군중 속에 몸을 내던지고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인입니다"라고 울부짖었다. 이 일로 그는 한 번 더 자기의 예리한 양심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다시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 식사 시간에는 그가 나체로 내려왔다. 그의 체격은 매우 좋았다. 그는 이 점에서 형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도 충분히 겨룰 수 있었다.

그의 죄책감은 다른 사람들보다 정직하게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이렇게 해서라도 우월감을 탈취하려고 한 노력이었다. 문제는 그의 노력이 인생의 무익한 측면에 치우쳐 있었다는 데 있다. 시험이라든가 직업으로부터의 도피는 그를 겁쟁이로 만들었으며 더더욱 무능력하게 만들었다. 신경증은 모두 그가 패배를 두려워했던 활동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일이었다.

그가 너무도 하찮은 수단으로 우월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은 그가 교회에서 몸을 내던졌을 때에도, 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식당에 나타났을 때에도 명확히 볼 수 있었던 셈이다. 그의 인생 방식이 바로 그러한 일을 요구했으며 그가 불러일으켰던 모든 감정은 완전히 그로 의한 것이었다.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개개인이 자기 마음의 통일성을 확립하고 몸과 마음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은 인생 최초의 4~5년 동안이다. 그는 자신의 유전적 소질과 환경에서 끌어낸 인상을 취합하여 우월성의 탐구에 적응시켜 간다. 다섯 살이 끝날 무렵까지 인간의 인격은 완전히 결정된다. 그 사람이 인생에 부여한 의미, 추구하는 목표,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 정서적인 특징 등이 모두 고정된다.

그것은 물로 나중에 변화할 수 있다. 이전에 했던 모든 행동들이 마치 한 사람의 인생 해석과 연결되어 있듯이, 만일 자신의 잘못을 수정한다면 그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모든 행동이 새롭게 표현될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환경과 접촉하고 여러 가지 인상을 받는 것은 육체적 기관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훈련하는 방법을 통해 자기의 환경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자기의 경험을 어떤 식으로 이용하려고 하는가를 알아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식으로 보고 듣는지 또 그의 주위를 끄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우리는 그에 대해서 이미 많은 것을 배운 셈이다. 육체적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자세는 모든 기관의 훈련과 인상을 선택하기 위해서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