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심리학이 결정론을 공격하는 이유
인생의 의미가 처음부터 잘못 부여되었다면 그릇된 해석이 내려지게 된 계기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런데 개인이 자기가 인생에 부여했던 잘못된 의미를 정정한다거나 혼자의 힘으로 끝까지 변화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대개 잘못된 접근에 대한 정정이 행해지는 경우는, 근원적인 잘못을 발견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원조를 받는 때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가 자신의 반려자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면, 또 상대방의 인생을 책임지고 풍요롭게 해 주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가장 좋은 상태로 만들려고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타인에게 공헌하려는 목표 없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너무나 난폭하고 오만스럽고 불쾌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공헌이야말로 참된 인생의 의미라고 추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산을 되돌아볼 때,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한 유산들이 오늘날까지 계승되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의 생활을 위해이루어졌던 조상들의 공헌 덕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경작된 토지와 철도, 건축물 등을 본다. 또한 전승되어 오는 철학적 체계와 자연과학, 예술, 우리들의 삶을 위한 모든 기술 속에서 조상들의 인생 경험으로부터 전해져 온 성과를 본다.
그러한 모든 성과는 인류의 복리를 위해서 공헌한 사람들에 의해 남겨진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타인과 협력하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 인생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 ‘나는 나의 인생에서 무엇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단순히 죽어 버렸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의 전 생애는 다만 무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지구 자체가 그들을 향해 선포할 것이다.
"우리는 그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지구의 인생에 적합하지 않다. 그대의 목적과 노력 그리고 그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정신과 혼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미래도 기약할 수 없다. 우리에겐 그대가 필요하지 않다. 떠나가라. 죽어서 사라져 버려라!"
협력이나 협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 대한 궁극적인 선고는 항상 "그대는 무익한 존재이다. 아무도 그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떠나 버려라!"는 것이다.
현재 우리의 문화는 불완전하다. 결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항상 인간의 복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한 방향이어야 한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 즉 인생의 의미란 인류 전체에 관심을 갖는 데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회적 관심과 사랑을 확신시키려는 사람은 항상 존재해 왔다.
우리는 모든 종파들이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관심을 갖고 있음을 본다. 세계적인 위대한 정신적 운동을 통해서 인간은 사회적 관심을 높이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 종교는 이런 방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노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럼에도 이제껏 종교는 잘못 해석되어 왔다. 만일 종교가 이 공통의 과제를 위해서 더욱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종교가 이미 성취해 온 그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개인심리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도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며, 과학적인 기술을 제공한다.
아마 과학은 다른 인간과 인류의 복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증대시킴으로써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다른 모든 운동보다도 훨씬 더 쉽게 목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방향에서 과제에 접근하지만 목적은 같다. 결국 그 목적은 타인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인생에 부여한 의미는 우리 곁에 있는 수호천사 혹은 항상 붙어 다니는 악령과 같은 작용을 한다.
따라서 이런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그 의미가 어떻게 서로 다른 점을 갖고 있는지, 그 의미들이 중대한 과오를 내포하고 있다면 어떻게 과오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이는 생리학이나 생물학의 영역과는 완전히 다른 심리학의 영역이다. 여러 가지 의미와 그 의미들이 인간의 행동이나 인간의 운명에 주는 영향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복리에 도움이 되려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어린 시절부터 이미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모종의 움직임, 마치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찾기 위해 손으로 더듬어 보는 듯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유아기 때에도 이미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생활 전체에서 자기의 역할과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들은 다섯 살이 끝나갈 무렵부터 여러 가지 문제나 과제와 씨름하기 때문에, 나름대로 논리정연하고 확고한 하나의 행동규범과 독자적인 방식을 만들어 낸다.
그 아이는 세계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지속적이고 지극히 깊숙하게 뿌리내린 관념을 이미 갖고 있다. 이때부터 아이는 세계를 하나의 확고한 통각(統覺) 체계를 통해서 보게 된다. 모든 경험은 그것들이 수용되기 전에 벌써 해석되고 있으며, 그 해석은 항상 인생에 주어진 근본적인 의미에 호응한다. 만약 이 의미가 중대한 잘못을 품고 있다고 해도 또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나 과제가 끊임없이 실패와 고통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이 의미가 간단히 방치되는 일은 결코 없다.
인생의 의미가 처음부터 잘못 부여되었다면, 그 일이 바로잡히기 위해서는 그릇된 해석이 내려지게 된 계기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아야 한다. 그렇게 잘못된 부분이 인식되어 통각 체계가 정정됨으로써만 올바른 궤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
그런데 개인이 이처럼 통각 체계를 바꿈으로써 자기가 인생에 부여했던 잘못된 의미를 정정한다거나 혼자의 힘으로 끝까지 변화하는 데 성공하는 경우는 지극히 보기 드물다.
잘못된 인식 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사회적 압력도 받지 않거나 혹 낡은 접근 방법을 고수하고 있다면 변화하기 힘든 법이다. 자신의 방식을 바꿔야 만사가 잘되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개 잘못된 접근에 대한 정정이 행해지는 경우는 이런 의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훈련을 받은 사람, 다시 말해 근원적인 잘못을 발견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고 더 적절한 의미를 암시하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의 원조를 받는 때이다.
유아기의 상황이 어떻게 여러 각도에서 해석되는지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유아기의 불행한 경험에도 완전히 반대의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불행한 경험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는 그 일이 장래를 위해서 도움이 될 때를 제외하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불행한 상황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 아이가 잘못되는 일 없이 더 좋은 상태에 놓이도록 해야만 한다’라고 느낀다.
한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느낄지도 모른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다른 사람들은 항상 우위에 서 있다. 세계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한다면 왜 내가 세계를 올바르게 취급해야만 한단 말인가’라고.
어떤 부모는 자기 아이들에게 “나도 역시 어렸을 때는 너와 같은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나는 그 곤경을 극복해 왔다. 너희들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혹은 이렇게 말하는 부모도 있을 수 있다.
“나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모두 용서되어야만 한다.”
위 네 사람의 행동에서 그들 각자의 해석이 명확하게 보이며, 그들이 자기들의 해석을 변경하지 않는 한 행동을 바꾸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점도 보인다. 개인심리학이 결정론의 이론을 공격하는 건 바로 여기에서이다. 어떤 경험이든 그것 자체가 성공의 원인이나 실패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경험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어린 시절에는 아주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기 쉬운 일정한 상황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대부분 그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사회가 그들 삶의 방식에 적의를 보이면—거의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럴 테지만—아이들은 이 적의를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학대받고 있는 새로운 증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처벌은 효과가 없다.
우리는 경험의 충격, 이른바 외상(外傷)으로 고통스러워할 게 아니라 그 경험 속에서 자신의 목적에 합치되는 바를 발견해 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바로 그 의미에 의해 ‘스스로 결정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정한 경험을 자기 장래의 인생을 위한 기초라고 생각할 때에는 항상 무언가 과오를 안고 있다. 의미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 상황에 어떤 의미를 주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아주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기 쉬운 일정한 상황이 있다.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는 대부분 그 상황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첫 번째로 불완전한 신체 기관을 갖고 태어나는 아이들, 즉 유아기에 병이나 허약 체질로 고생한 아이들이 겪게 되는 상황이 있다.
그런 아이들은 과잉 부담을 짊어지고 있으며, 인생의 의미가 타인에게 공헌하는 데 있다고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 곁에 있으면서 그 아이들이 자기 자신 이외에 타인에게도 관심을 갖도록 하지 않는 한, 그들은 오로지 자기의 기분에만 얽매이기 쉽다. 후에 그들은 주위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보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또한 그러한 운명 속에서 아이들은 주위 사람들이 보이는 동정과 조소, 기피하는 태도에 의해서 열등감이 심화되는 경우마저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사회 속에서 유익한 역할을 해내려는 희망을 잃고, 세상 사람들이 온통 자기를 개인적으로 멸시하고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불완전한 신체 기관을 갖고 있다거나 선(腺) 분비가 비정상적인 아이들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처음으로 언급했었다. 과학에서 이 분야는 놀랄 만큼의 진보를 이루었지만 내가 바라고 있던 방향으로 발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처음부터 탐구하였던 바는 이런 곤경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으며, 실패의 책임을 유전이나 육체적 상태에 되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의 기관이 아무리 불완전하다고 해도 그 자체가 인생을 잘못된 유형으로 이끄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체적인 특징이나 영향이 똑같은 아이는 없다. 우리는 종종 이런 모든 곤란을 극복하고 유익한 능력을 발휘하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심리학이 우생학적 선택이라는 기획을 위해 매우 적합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명한 인물, 우리 문화에 위대한 공헌을 했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선천적으로 불완전한 기관을 갖고 있었던 경우가 많다. 대부분 그들의 육체는 건강하지 못했으며 때로는 일찍 숨을 거두기도 했다.
인류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공헌들은 주로 신체적이든 그 밖의 외적인 조건에 있어서든, 곤경을 맞이하여 힘들게 극복해 나갔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런 투쟁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도록 하였다. 정신의 발달이 좋은지 아닌지는 단순히 신체로서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까지 불완전한 기관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 대부분은 올바른 방향으로 훈련받을 기회가 없었다. 그들이 짊어진 역경을 이해해 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아이들은 주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쏟아왔다. 유아기에 불완전한 기관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좌절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두 번째로, 인생의 경험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게 만드는 흔한 상황 중의 하나인 응석받이 아이들이 겪게 되는 상황이 있다.
응석받이 아이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마치 법률처럼 취급되기를 기대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그 아이는 보살핌을 받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잘 보살펴져 왔으며, 이러한 혜택이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권리라고 믿게 된다.
그 결과 그 아이는 자기가 주목받지 못하는 상황, 타인들이 그의 감정에 대해 신경 쓰고 배려하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삼지 않는 상황에 놓이면 몹시 불안해하고 마침내 세계가 그를 버렸다고 느낀다. 타인에게 베푸는 것보다 타인에게 기대하도록 훈련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해결할 방법을 배운 적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항상 도왔기 때문에 그는 독립심을 잃고 스스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의 관심은 오직 스스로에게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들과의 협력의 유익함이나 필요성에 대해서도 배운 일이 없다. 따라서 곤란한 상황에 빠지면 스스로 대처하지 못하고 오직 타인에게 요구하는 방법 외에는 모른다.
그에게는 다시금 우월한 입장을 획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가 특별한 인간이라 인정하고,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있어서 가장 올바른 상황이라고 생각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이 응석받이 아이의 모습이 그대로 굳어져 어른이 된 사람들이 아마 사회 속에서 가장 위험한 계층일 것이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는 선의를 갖고 있다고 단언할지도 모른다.
전제군주와 같은 자리에 서기 위해서 그들은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처럼 보이려 들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들은 통상의 인간적인 일에 대해, 보통의 인간으로서 서로 협력하는 일에 반항하고 있다. 게다가 더욱 철저하게 반항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는 안이한 따스함이나 종속감이 두드러지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들은 배반당했다고 느낀다. 그들은 사회가 그들에게 적대적이라 생각하고 모든 주위 사람에게 복수하려 든다.
만약 사회가 그들 삶의 방식에 적의를 보이면 거의 의심할 나위 없이 그럴 테지만 그들은 이 적의를 자기들이 개인적으로 학대받고 있는 새로운 증거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들에 대한 처벌은 효과가 없다.
처벌은 단지 타인이 자기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의견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응석받이 아이가 철저하게 반항을 하든 약점에 의해 지배하려고 하든, 폭력에 의해 복수를 하려 들든 이는 모두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응석받이들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제일인자가 되는 일을 의미한다.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하고,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면 뭐든 손에 넣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인생에 이러한 의미를 계속 부여한다면 그들이 이용하는 방법은 모두 잘못되게 마련이다.
과오를 범하기 쉬운 세 번째 상황은 무시된 아이들이 처하게 되는 상황이다.
무시되어진 아이들은 사랑이나 협력에 대해 알 기회가 없다. 따라서 그러한 훌륭한 힘을 도외시한 인생의 해석을 만들어 낸다. 인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그들은 문제의 곤란함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타인의 도움과 성의를 받아 거기에 대항하는 자기 자신의 능력은 과소평가한다. 그는 사회가 자기에게 매우 냉혹하다고 생각하며 항상 그런 상황을 이야기한다.
게다가 그는 타인에게 유익한 행위를 함으로써 애정이나 존경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타인에 대한 의심이 깊어지고 자기 자신마저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대신할 수 있는 경험은 조재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이에게 신뢰할 수 있는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다. 그러한 신뢰감이 차츰 아이를 에워싼 모든 환경을 포함하도록 넓게 확장시켜야 한다.
만약 어머니가 이 최초의 임무에 실패한다면 아이는 사회적 관심을 받거나 이웃 사람들의 우정 어린 관심을 받기가 어려워진다. 타인의 관심과 애정, 협력을 얻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능력은 육성되고 훈련되지 않으면 그 발달이 저해된다. 만약 완전하게 무시되고 미움을 받거나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협동이라는게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기가 십상이다.
무시된 상태로 자란 아이는 결국 고립되어 지내면서 타인과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사람들과 협력해서 살아가는 일에 완전히 무지하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런 상태에 있는 개인은 자멸해 버리고 만다.
우리는 보편적인 보살핌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혹은 어떤 점에서는 무시되어 왔지만 다른 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시당한 아이들이란 신뢰할 수 있는 타인을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다.
고아나 사생아가 인생에 있어서 실패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런 이들을 무시된 아이들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글프다.
이러한 세 가지 상황, 즉 불완전한 신체 기관을 가졌거나 응석받이 혹은 무시된 상황은 인생에 대해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커다란 계기가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 있던 아이들은 거의 언제나 모든 문제에 대처하는 그들의 표현 양식을 수정하기 위해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그들이 보다 좋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런 일에 대한 안목을 갖고 있다면, 다시 말해 그들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올바른 방향으로 스스로 훈련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들이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