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법
심리학과 법의 관계
인간행동의 통제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심리학과 법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과 형식에서 심리학과 법은 매우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법은 개인이 자신의 행위와 그에 뒤따르는 거의 모든 결과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가정에 기초한 규범체계로 이루어져 있다(Morse, 1978). 반면에 심리학은 인간행동이 그에 선행하는 경험과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는 가정에서 시작함으로써 인간행동에 대한 상당히 결정론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 결정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인간행동의 많은 부분은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관된 법칙과 원리에 의해서 일어난다(박광배, 2002).
심리학과 법은 모두 애매모호하고 매우 복잡한 현상을 다루므로 그러한 현상에 대한 판단과 결론은 불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방식에서 심리학과 법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실증학문인 심리학은 검증 가능한 절차에 의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그것에 기초하여 결론을 도출하는 데 반해, 규범체계로 이루어진 법은 규범과 원칙에 기초하여 판단한다. 또한 심리학적 분석 수준은 집단인 반면 법적 분석 수준은 개인으로, 심리학과 법은 분석의 수준에서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심리학은 일반적인 인간의 사고, 행동, 감정을 분석하는 반면에 법은 특정한 개인을 분석의 대상으로 한다(박광배, 2002).
바로 이러한 분석 수준의 차이 때문에 심리학을 법에 적용할 때 어려움이 생긴다. 예컨대 남편에게 장기간 학대를 받던 아내가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법관은 특정한 피고인 A가 남편을 왜 살해했을까를 궁금하게 여기겠지만, 심리학자는 남편의 극심한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경우 남편을 살해하고자 하는 동기가 일반적으로 생길 것인지를 궁금해 할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자가 법정에서 전문가로서 진술할 때는 불특정 다수의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언급하는 반면, 법정이 그 전문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특정한 개인에 대한 판단이기 때문에, 사법판단에서는 법과 심리학 사이에 사실상의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규범(이론)을 가지고 사실에 대해 판단을 해야 하는 법과 실제 인간의 행동을 기준으로 이론을 검증하고자 하는 심리학은 오랫동안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 그럼에도 사법적 판단의 대상으로 인간의 행동에 대한 근본적인 관심 때문에 서로의 관계는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대륙법(성문법)의 경우에는 훈련된 법률전문가가 거의 모든 재판절차를 진행하기 때문에, 수사과정이나 판결과정에서 실증과학이 이바지할 수 있는 부분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와 달리 보통법(영미법)에서는 재판이 일종의 검사와 피고인 측에서 벌이는 경기와 같은 것이어서, 증거의 증거능력이나 수사절차 등이 법정에서 문제가 된다. 또한 배심제를 통하여 보통 사람들이 재판에 참여함으로써 법조인이 아닌 일반 시민을 설득해야 하는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수사, 재판, 교정 전반에 걸쳐 인간의 행위에 대한 기본지식, 즉 심리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박광배, 2002). 현재 형사사법 절차에서 활용하고 있는 심리학의 영역도 국가의 법 체제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성문법 위주의 대륙법 국가는 판결과정보다는 판결 후 교정단계에서 심리학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판례 중심의 보통법을 적용하는 국가에서는 수사 및 판결단계에서 심리학을 매우 활발하게 활용하고 있다.
사법절차와 심리학
범죄심리학을 Howitt(2004)의 정의대로 범죄인의 심리적인 측면을 다루는 학문분야로 한정하든, Wrightsman(2001)의 주장대로 심리학적 지식이나 방법론을 사법 시스템에 적용하는 보다 응용된 심리학의 영역까지 포함시키든, 언제나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연구 주제는 범죄동기의 심리적 측면, 범죄수사 기법, 범죄자 위험성 평가와 재범 예측 등이다. 이들 주제와 관련하여 심리학은 형사사법 현장에 매우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해 왔고 오늘날 그 필요성은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수사 및 기소단계에서의 심리학의 활용
그 하나가 목격자 진술로, 어떤 범죄이든 수사과정에서 목격자가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은 그 범죄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목격자의 진술을 100%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목격자 진술과 관련된 연구를 종합해 볼 때, 목격자 진술의 정확성은 대체로 50% 정도이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에 관한 심리학 연구는 진술의 정확성을 저해하는 요인을 알아내는 데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으며 보다 정확성을 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도 한다.
이와 함께, 경찰이 목격자나 용의자로부터, 또는 변호사나 검사가 증인으로부터 보다 더 정확한 정보를 많이 이끌어 내기 위한 효과적인 면담기법을 개발하는 데 심리학을 활용할 수 있다. 특히, 면담자가 내담자(목격자나 증인)의 기억을 활성화시켜주는 일종의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인지적 면담 기법의 효과가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Fisher & Geiselman, 1992).
심리학은 신문과 자백의 과정에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용의자들이 허위자백을 하거나 강압에 의한 자백을 많이 한다는 사실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에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는 용의자에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를 체포 전에 고지해야 한다. 이것이 소위 1966년 선언된 미란다 원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문과 자백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주로 자백이 거짓으로 밝혀진 사례들을 분석하여 허위자백의 특징과 허위자백을 하게 되는 상황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또한, 심리학은 범죄자의 유형에 관한 정보를 수사기관에 제공하여 용의자의 범위를 축소하거나 범죄행동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국내에서도 경찰청을 중심으로 범죄분석요원(프로파일러)을 선발하고 있다. 그러나 학술적으로는 아직 동종의 범죄자들이 꼭 유사한 행동양식을 가지는지에 대한 것이 경험적으로 검증된 바 없다. 또한 한 번으로 그치는 범죄의 경우에는 범죄자의 유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파일링을 유용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더 이루어져야 한다.
한편, 범죄자와 경찰 간의 대치상황에서 범죄자가 사건을 더욱 극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미리 예방하고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전담하는 경찰을 협상전문가라고 한다(김시업, 2003). 협상의 상황은 주로 테러 및 인질 사건에서 발생하는데, 미국에서는 이러한 사건에 대해서 협상팀에 속한 임상심리학자가 협상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심리학자는 협상절차에서 인질범을 평가하거나, 협상전략에 사용할 수 있는 행동과학적 정보를 수집하고, 협상가 훈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참여하기도 한다(Wrightsman, 2001; 박성수, 김경옥, 2005 재인용).
진술 분석과 관련해서, 심리학에서는 언어적 혹은 비언어적 행동을 통하여 거짓말의 여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법을 논의해 왔다. 이것은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언어적 및 행동적 징후를 관찰하여 거짓말을 판정할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질문과 답변 사이에 소요되는 시간의 간격, 팔이나 손가락의 움직임, 진술을 할 때 의성어를 하는 것, 진술의 상세한 정도 등의 징후를 관찰하여 거짓말의 여부를 판정한다. 그 대표적인 진술 분석 기법으로는 진술타당도분석(SVA: SStatement Validity Analysis), 준거기반내용분석(CBCA: Criteria-based Content Analysis), 현실검증(RM: Reality monitoring), 과학적 내용분석(SCAN: Scientific Content Analysis) 등이 있다.
재판단계에서의 심리학의 활용
먼저, 범죄자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데 심리학이 관여할 수 있다. 이러한 책임능력은 오랫동안 심리학의 관심 대상이 되어 왔다. 1843년에 마련한 책임능력에 관한 최초의 법적 기준인 McNaughton 원칙은 사물변별 능력, 즉 인지능력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 후 1954년에 제정된 Durham 원칙은 사물변별 능력과 동시에 행위통제 능력을 기준으로 삼았고 뒤이어 1962년 Brawner 원칙에서는 충분한 역량의 결여라는 개념이 포함되었다. 이렇듯 책임능력의 판단을 위한 법적 기준이 변화함에 따라, 책임능력을 판단할 때 어떤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유죄나 무죄 판결이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책임무능력자로 판단된 피고인의 재범 가능성 등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범죄의 동기와 원인 관련한 분야에서 심리학은 유전, 지능, 성격, 가정환경, 친구, 학교, 교육수준, 범죄행동 당시의 상황 등이 범죄의 원인인지를 연구한다. 또한 일생 동안 범죄행동의 시작 시점, 지속 기간, 감소 시점 등이 심리학의 연구 주제이다. 특히 범죄심리학 이론들은 범죄행동의 종류와 정도를 결정하는 요인을 규명하는 동시에 범죄행동을 제어하는 요인을 파악하고, 범죄자가 범죄를 실행에 옮기는 사고과정(Farrington & Knight, 1980)을 밝히고자 한다.
배심원 관련 영미법의 전통을 따르는 국가(미국과 영국)에서는 배심원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배심원의 규모, 과학적인 배심원의 선정 방법, 배심원의 의사결정 과정, 판사의 설시(說示)에 대한 이해도 등에 관한 연구가 있다.
심리학자는 때때로 법정 및 청문회와 같은 현장에서 자신의 전문지식을 실제 사례에 적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전문가 증인’으로서의 역할은 전통적으로 법정심리학에서 다루어 왔지만, 범행 당시 피고인의 정신상태를 설명하는 것은 범죄심리학의 응용 영역이기도 하다. 전문가 증언은 정신이상에 의한 형사책임 능력을 비롯하여 새로운 정신질환 및 증후군, 즉 다중인격장애, 월경 전 증후군, 전쟁증후군, 피학대 아내 증후군 등도 그 대상이 되고 있어 심리학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Slobogin, 1999; 박성수, 김경옥, 2005 재인용).
재판상담가는 실제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 예측하기 위해서 배심원의 태도와 역할을 연구하고 평가하며, 배심원을 선택할 때 변호사 측을 지원하고, 증인의 증언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지원해 주는 역할을 한다. 중재자는 재판 이전에 당사자들 간의 논쟁을 해결하는 데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주로 법률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한다. 이들은 형사사건뿐만 아니라 민사사건도 담당한다.
형 집행단계에서의 심리학의 활용
현대 교정정책의 주요 목표는 응보적 형벌의 집행 이외에 치료 및 재활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교정현장에서는 심리치료 원리를 응용한 많은 교화 프로그램이 적용되고 있다. 외국 교정시설의 경우 심리학자들을 고용하여 구체적인 교화방안을 개발하고 적용하며, 교화 프로그램에서의 범죄 위험성 개선 여부에 따라 사회로 복귀하는 가석방 시기를 조절한다(Milan & Long, 1980).
이와 함께, 재소자에 대한 객관적 분류는 교정시설에서 관리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재소자의 인권보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최근 국내외 대부분의 교정시설에서는 주관적인 분류가 아닌 객관적 분류모델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들은 수용 및 교화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해 표준화된 일련의 평가절차를 통하여 개별 입소자/재소자의 위험성을 평가하고 분류한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심리평가의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심리학은 범법자의 재범 위험서을 예측하는 데도 유용하다. 재범 위험성에 대한 판단은 양형결정에도 중요한 요인이며, 보석 밒 가석방의 결정, 치료감호의 결정과 종료시점의 결정 등에서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재범 가능성을 평가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인데, 인간의 행동은 일시적인 상황요인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예측의 오류 요인을 신중하게 고려하여야 한다. 특히 재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 사람들이 사실상 재범을 하지 않는 오류긍정(false positive)의 경우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교정상담 관련1800년대에는 목사가 교정시설에서의 상담을 주로 했고, 그다음에는 보호관찰관이나 가석방 담당자가 상담을 하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정신과 의사, 상담전문가, 심리학자, 사회학자 및 사회사업가가 이 분야에 참여하여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이윤호, 이수정, 공정식, 2000). 교정상담은 단순한 상담이 아닌 치료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즉, 교정상담의 목적은 수형자가 겪는 다양한 부적응과 문제점에 대하여 치료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정상담가는 수형자에 대한 개별사항을 숙지하고 치료계획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 후 상담절차에 따라서 개별상담과 집단상담을 수행할 수 있다(Van Voorhis, Braswell, & Lester, 1999; 박성수, 김경옥, 2005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