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memory)이란 시간에 걸쳐 특정한 정보를 획득하고 저장하였다가 인출하는 과정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억력을 생각할 때 열심히 외운 내용을 시험 볼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이 필요한 정보를 적절한 시기에 생각해 내서 사용하는 단순한 형태를 떠올리지만, 실제 기억은 모든 인지 활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지심리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지식인데, 내가 경험하여 획득한 정보가 기억에 저장되지 않고서는 지식이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정보를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저장소에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는 것을 기본적인 기억 과정이라고 할 때, 기억은 기본적으로 다음 3가지 과정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째, 우리가 경험하고 획득한 다양한 정보를 그 저장소 안에 집어넣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부호화(encoding) 과정이라고 한다. 둘째, 저장소 안에 입력된 정보를 계속 유지해야 하는데 이를 저장(storage) 과정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장소 안에 있는 정보를 필요할 때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인출(retrieval) 과정이라고 한다.
기억이 이 세 과정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단순한 형태라면 이해하기 편하겠지만,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억이 저장되는 곳을 의미하는 저장소도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획득한 정보를 저장하는 저장소로 감각기억, 단기기억(작업기억), 장기기억의 세 종류가 있다. 이 세 저장소를 중심으로 정보의 흐름을 간략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이 세 종류의 저장소를 중심으로 기억의 속성들을 알아보자.
감각기억의 종류와 용량
감각기억(sensory memory)은 감각 정보가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머무르는 저장소이다. 이곳은 저장해야 할 정보가 최초로 저장되는 저장소로, 세 가지 저장소 중에서 정보가 가장 짧게 머무른다. 감각기억에 저장되는 정보들을 감각 정보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경험 및 학습을 통해 획득하는 대부분의 정보들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얻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5장에서 인간이 5가지의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감각 정보를 독립적으로 처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마찬가지로 감각기억도 각 감각의 종류별로 따로 존재한다. 특히, 시각과 청각과 관련된 감각기억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시각과 관련감각 정보가 저장되는 곳을 영상기억(iconic momery)이라 하고, 청각과 관련된 감각 정보가 저장되는 곳을 반향기억(echoic momery)이라 한다. 각 감각 별로 얻는 정보의 특성도 다른 것처럼, 감각기억에 정보가 머무르는 시간도 조금은 다른데, 영상기억의 경우 일반적으로 1초 이내로, 반향기억은 5초 이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Darwin, Turvey&Crowder,1972).
정보가 매우 짧은 시간 동안에만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은 감각기억의 용량에 대해서 부정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실제 감각기억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저장할 수 있을까? George Sperling이라는 학자가 1960년에 감각기억에 용량을 알려주는 전설적인 실험을 실시했다. 실험참가자에게 매우 짧은 시간 동안(50밀리 초, 즉1/20초) 영어 알파벳 자음 문자를 4개씩 3열 총 12개 보여준 후, 자신이 본 문자를 보고하도록 하였다. 정말 짧은 시간 동안만 문자를 보여줬음에도 불고하고, 참가자들은 대략 절반 이하 개수의 문자를 기억해 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예상해 보면, 감각기억의 용량이 영상기억의 경우 대략 문자 6개 정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감각기억의 정보들이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문다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영상기억의 정보들은 1초만 지나도 없어진다. 혹시, 감각기억에는 실제 더 많은 문자에 대한 정보가 저장되어 있지만, 참가자가 문자를 보고하는 동안에 아직 보고하지 못한 정보들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의문이 들 수 있다.
Sperling은 실험 절차를 아주 약간 수정하는, 매우 교묘한 방법으로 이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매우 짧은 시간 동안 12개의 문자를 보여주는 것은 위의 실험과 동일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달리 문자가 사라지자마자 고음, 중음, 저음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 소리는 참가자들에게 보고해야 할 문자열을 알려주는 것이었는데, 참가자들은 고음이 들렸을 때는 제일 윗줄의 문자 4개를, 중음이 들렸을 땐 가운데 줄의 문자 4개를, 저음이 들렸을 땐 아랫줄의 문자 4개를 보고해야 했다. 그 결과 정답률이 급격하게 향상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자신이 보고해야 하는 4개의 문자를 모두 보고할 수 있었다. 12개의 문자열을 제시한 시점까지는 참가자들이 소리를 듣기 전이기 때문에, 그들이 어느 줄의 문자를 보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참가자들이 외워야 하는 문자의 양은 앞의 실험과 동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실험에서 참가자들이 모든 문자를 보고했다는 사실은 위의 실험 결과가 감각기억에 저장된 정보 자체는 많으나 보고하는 과정에서 소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 결과는 감각기억의 용량이 5~6개 정도의 문자가 아니라 거의 무한대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감각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무한대의 정보들은 어떤 운명을 갖게 될까? 앞에서 말했듯이, 감각기억의 정보들은 매우 빠르게 없어진다. 우리가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 것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감각기억에 있는 일부의 정보들이 앞으로 이야기할 단기기억이라는 저장소로 옮겨진다. 그럼 감각기억에 있는 그 많은 정보들 중 어떤 정보들이 단기기억으로 옮겨질까? 그것은 주의를 받은 정보들이다.
감각기억에서 단기기억으로의 부호화: 선택적 주의
방학이 끝나고 개강을 맞아 모처럼 학과 모임을 나갔다. 익숙한 주점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주점 안은 무척이나 시끄럽다. 그 소리들은 마치 소음처럼 들린다. 나와 친구들 간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소음 속에서도 친구들과 대화는 이루어진다. 그러다 갑자기 내 귀를 사로잡는 소리가 있다. 누군가 내 이름을 언급한 그때, 신기하게도 나는 내 이름을 듣고 고개를 돌린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모두 겪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시끄러운 곳에서 주변에 관심을 끊고 나의 일에 몰두하고 있다가도, 다른 어디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런 현상을 '칵테일파티 효과(Cherry,1953)'라고 한다.
칵테일파티 효과는 주의(attention)의 선택성을 보여준다. 주의는 주변에 있는 많은 정보들 중 일부의 정보들을 선택하여 처리하게 해 주는 관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주의를 통한 정보의 선택은 두 가지 방법으로 일어날 수 있다. 하나는 내가 나의 의지로 선택하는 것이다. 이를 내인성 주의(endogenous attention)라고 한다. 위의 예에서 처럼 나의 귀에는 수많은 소리들이 들리지만, 그것이 나와 관련 없는 소리일 때, 나의 주의 기제는 그 정보들을 나로부터 분리시키고 나와 내 친구 사이의 대화에만 주의를 두게 한다. 우리는 내인성 주의를 통해 나의 대화와 관련된 정보만을 처리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이름 같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나의 주의 기제가 반사적으로 반응한다. 즉, 내가 그러한 정보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선택한다. 이때의 주의를 외인성 주의(exogenous attention)라고 한다.
칵테일파티 효과가 청각 정보에 대한 주의의 선택성을 보여준다면,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유명한 무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Simons&Chabris,1999)는 시각 정보에 대한 주의의 선택성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여러 명의 학생들이 농구공을 서로 패스하는 영상을 보면서, 학생들 중에서 흰색 옷을 입고 있는 학생들끼리 패스하는 횟수를 세라고 지시받았다. 학생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도중에 갑자기 고릴라 한 마리가 영상에 등장해서 화면을 가로질러 지나갔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농구공 패스 횟수를 세는 데 모든 주의를 쏟은 참가자들은 그 고릴라의 등장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주의가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혀 처리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제 다시 주의와 감각기억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감각기억에는 무척이나 많은 정보들이 잠시 동안 머문다. 그 정보들 중에서 일부 정보에 내인성 주의이든 완성 주의이든 주의가 주어지면, 그 정보들은 단기기억으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