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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상처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치료)

by Uzoob 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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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는 치료

그런데 만약 부모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며, 불행한 결혼 생활은 더욱 나쁘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가 한쪽 부모에게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만 하며 또한 우리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협력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열 살 된 남자아이가 진료소에 왔던 일이 있다. 소년은 학교 선생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심술궂게 행동하며 품행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소년은 학교에서 다른 아이의 물건을 훔치고 훔친 물건을 다른 학생의 책상 속에 넣어서 비난받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런 행위는 이 소년이 다른 아이를 자기의 수준까지 끌어내릴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아이는 그들에게 창피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아닌 그들 쪽이 더 심술궂고 품행이 나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만약 그런 행동이 아이의 고정된 품행이라면 아마도 가정에서 그렇게 훈련받았으리라는 사실, 그리고 가족 가운데 그 아이가 책임을 지우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아이는 길에서 임신한 부인에게 돌을 던져 문제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열 살이라면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일인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 아이가 임신이라는 상태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여동생이나 남동생의 탄생에 대해 그가 기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확인해 보아야 한다.
교사에 의하면 아이는 ‘주위의 흑사병’이라 불리고 있었다. 아이는 주위 친구들을 괴롭히고 별명을 지어 부르며 그들의 흉을 보고 다녔다. 소년은 여자아이를 쫓아가서 때리기도 했다. 그 사실에서 아이가 경쟁하고 있는 대상이 다름 아닌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아이가 두 남매 중의 맏아들이며 네 살 아래인 여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이는 여동생을 사랑하고 있으며 언제나 동생에게 잘 대해 준다고 했다. 이 말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런 아이가 자기의 동생을 사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서야 우리의 의문이 밝혀졌다.
어머니는 자신과 남편과의 관계를 매우 이상적이라고 주장했다. 바로 이 점이 아이에게는 커다란 불만의 하나였다. 확실히 부모는 자식의 잘못에 아무런 책임도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아이의 나쁜 행동은 그 자신의 나쁜 성품이나 운명에 의해서, 혹은 누군가 먼 조상으로부터 온 것일까.
우리는 이상적이라 불리는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 그렇게 훌륭한 부모 밑에 어떻게 그런 나쁜 아이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사실 교사, 심리학자, 변호사, 재판관들에게서도 이런 불운한 케이스가 많이 나타난다.
부모의 ‘이상적인 결혼 생활’은 이런 아이에게는 매우 곤란한 일이 되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해 헌신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아이를 초조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아이는 어머니의 주의를 독점하고 싶어 하며 어머니가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보이는 일에 반발하기도 한다.
만약 부모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며 불행한 결혼 생활은 더욱 나쁘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일까? 우리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협력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며, 아이가 한쪽 부모에게 기울어지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우리가 고찰한 이 소년은 응석받이였다. 아이는 어머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고, 자기가 만족할 만큼 주의를 끌고 있지 않다고 느끼면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훈련하고 있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이제까지 이야기해 온 바와 똑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직접 벌을 주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아들을 혼내게 했다. 아마 그녀는 자기를 약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자만이 명령하고 지배할 수 있으며 남자만이 벌을 줄 힘이 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는 자기의 아이가 자기에게 애착을 가져 주기를 바라며 그 아이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을 수도 있다. 결국 그녀는 아이가 아버지에게 흥미를 갖고 협동하지 않도록 훈련시키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마찰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그 아버지에게 아내나 가족을 사랑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기 아들 때문에 일을 마친 후 집에 돌아오기가 싫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 아들을 심하게 벌주고 때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반면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싫어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이 아니다. 아이는 지적 장애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기의 감정을 매우 훌륭하게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아이는 여동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동생과 사이좋게 논 적이 없고, 자주 동생을 윽박지르고 발로 차기도 했다.
그는 식당의 침대 겸용 소파에서 자는데 동생은 부모 방의 아동용 침대에서 잔다. 만일 우리가 이 소년과 같은 입장이 되어 본다면, 부모의 방 안에 있는 아동용 침대에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다.
이 소년의 마음을 통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보도록 노력해 보자. 아이는 어머니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키고 싶어 한다. 방에는 동생이 어머니 곁에서 잠들어 있다. 아이는 어머니를 자기와 가깝게 만들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왜 소년이 임신한 여성에게 돌을 던졌는지에 대해 전보다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소년은 건강했다. 그는 정상적으로 태어났으며 7개월까지 모유로 자랐다. 처음으로 우유병을 물렸을 때 그는 토했다. 아이의 구토는 세 살까지 계속되었다. 아마 틀림없이 아이의 위가 약했을 것이다. 지금은 잘 먹으며 영양 상태도 좋지만 아이는 계속해서 위장에 관심을 두어 왔다. 아이는 위장이 자기의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는 음식에 대해서 몹시 까다로웠다. 어머니는 아이가 음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때마다 돈을 주어 밖에 나가서 좋아하는 것을 사 먹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부모님이 자기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이는 상습적인 소년의 계략이다. 그 계략은 언제나 똑같다. 우월감을 탈취하려는 그의 방식은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일이다. 아이의 목표는 다른 사람들의 최대 약점을 찌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지금에야 비로소 소년이 진료소에 왔을 때 이야기해 주었던 꿈을 이해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서부의 카우보이였어요. 그들은 나를 멕시코로 보냈죠. 나는 미국으로 가는 길을 싸우면서 가야만 했어요. 어떤 멕시코 인이 덤볐을 때 나는 그의 위장 근처를 발로 차 버렸어요.”
그 꿈의 감정은 ‘나는 적으로 완전 포위되어 있다. 나는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카우보이는 보통 영웅시된다. 소년은 사람들의 배를 발로 차는 행동이 영웅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의 인생에서 위장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아이는 위장을 최대의 약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도 위장이 약하다는 점 때문에 고민하였으며 아이의 아버지도 신경성 위장 장애가 있어서 언제나 그 부분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 가족에게 위장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년의 꿈도 그의 실제 행동도 매우 똑같은 인생 방식을 보여 준다. 아이는 현실을 꿈속에서처럼 생활하고 있다. 만일 이쯤에서 소년이 잠을 깨도록 할 수 없다면 그는 계속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는 아버지나 동생이나 작은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과 투쟁할 뿐 아니라 그의 이런 투쟁을 저지하려는 의사와도 싸우려 할 것이다. 그의 꿈은 자신이 전과 똑같은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하여, 즉 계속 영웅으로서 군림하고 타인을 정복하도록 자기를 자극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지 모르는 한 우리는 그를 도울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소년의 꿈은 진료소에서 그에게 설명되었다. 그 꿈의 내용은 ‘나는 적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 나를 벌주거나 야단치는 모든 사람들은 나의 적이다’라는 식이었다.
소년이 진료소에 다시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이전에 우리가 만난 뒤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물었다. 아이는 “나는 줄곧 나쁜 아이였어요”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묻자 “여자아이를 몹시 혼내 주었어요” 하고 대답했다.
이 말은 순수한 고백이 아니었다. 그 표현은 자만이며 일종의 공격이다. 진료소는 사람들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려는 곳인데, 그는 자기가 스스로 나쁜 아이였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말은 ‘무엇이 좋아진다는 거야. 내가 당신의 위장을 발로 차 버렸는데’ 하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소년은 또 꿈을 꾸고 있다. 소년은 아직 영웅으로서 연기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가 그 역할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족감을 감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우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말하는 영웅은 여자아이를 혼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행동은 나쁜 영웅주의를 흉내 낸 데 불과한 게 아닐까? 만약 네가 정말 영웅이 되려 한다면, 크고 힘이 센 여자아이를 혼내 주어야 하지 않겠니? 그렇더라도 애당초 여자아이를 쫓아다니며 혼내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란다.”
이 방법은 치료의 한 부분이다. 우리는 그의 눈을 뜨게 해서 기존의 인생 방식을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하도록 제지해야만 한다. ‘상대방의 수프에 침을 뱉는다’라는 격언처럼 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자기의 수프를 좋아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측면은 그가 협동하며 인생의 유익한 측면에서의 의미를 추구하도록 용기를 갖게 하는 일이다. 유익한 측면에 머무름으로써 상처 입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인생의 무익한 측면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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