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오류를 발견하라
꿈이나 공상은 확실히 유익한 것일는지 모른다. 꿈의 세계에서나 눈을 뜨고 있는 세계에서나 똑같은 인격을 갖지만, 꿈속에서는 사회적 요구의 압력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인격은 극심한 방어나 은폐 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기 쉽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인생에 대해 부여한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사람의 기억을 통해서이다. 기억이란 아무리 하찮아 보이더라도 그에게 있어서 무언가 기억할 가치가 있음을 나타내 준다. 기억을 떠올릴 때 그 일은 인생에 대해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에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기억은 그것을 떠올리는 사람을 향해서 이야기한다. ‘당신이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은 이것이다’ ‘이 일은 당신이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라고.
나는 경험 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새삼 강조한다. 경험은 끈질기게 기억으로 남아 인생에 부여할 의미를 결정시키기 위해서 이용되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은 하나의 기념품이다.
유아기의 기억은 각 개인의 자기 인생에 대한 독특한 대처 방법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는가를 보여 준다. 또한 그가 인생에 있어 최초의 결정을 내려야 했던 모든 상황들을 이해하는 데 특히 도움이 된다. 게다가 가장 초기의 기억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상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우선, 그 속에는 개인과 상황에 관한 근본적인 견해가 함축되어 있다. 그 일은 모든 상황에 대한 최초의 결산이며 자신에게 주어졌던 모든 요소에 대한 최초의 완전한 상징이다.
다음으로, 초기 기억은 그의 주관적인 출발점이며 자기 자신을 위해 묘사한 자서전의 시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 속에서 그가 가끔씩 느꼈던 약하고 불안정한 입장과 자신의 이상이라고 여기는 강력하고 안전한 목표와의 대조를 볼 수 있다. 심리학의 목적에 있어서는 개인이 최초의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실제로 그러했는지 혹은 심지어 현실의 사건에 대한 기억인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억이 중요한 이유는 그 해석과 현재 및 미래의 인생에 대해 갖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이제 유년기 초기의 기억을 예로 들어 그 내용이 바로 그 기억들이 결정시킨 인생의 의미라는 것을 입증해 보겠다.
첫 번째로 ‘나는 커피포트가 탁자에서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라는 기억을 생각해 보자.
그녀가 ‘인생이란 그런 거야!’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무력감에 쫓기며 인생의 위험이나 곤란 등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또 그녀가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른 사람이 충분히 돌봐 주지 않았다고 비난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작은 여자아이를 위험에 직면하도록 놔두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매우 부주의했음을 말해 준다.
두 번째 일례도 세상에 대한 비슷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내가 세 살 때 유모차에서 떨어졌던 일이 있다’라는 최초의 기억과 함께 그가 자주 꾸는 꿈의 내용은 이러했다.
‘밤중에 잠에서 깨면, 세계에 종말이 와 있고 하늘이 불로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다. 별이 모두 떨어지고 우리는 다른 혹성과 충돌하게 된다. 충돌하기 직전에 나는 잠에서 깨어난다.’
이 학생에게 무언가 두려워하는 게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성공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최초의 기억과 반복되는 꿈이 인생에 있어 용기를 꺾는 작용을 했음이 확실했다. 그는 실패와 파국에 대한 두려움을 심하게 갖고 있었다.
세 번째로, 야뇨증이 있으며 어머니와 끊임없이 언쟁을 하는 문제로 진찰을 받게 된 열두 살짜리 소년은 자기의 맨 처음 기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엄마는 내가 없어진 줄 알고 큰소리로 나를 부르면서 거리에 뛰어나갔어요. 몹시 놀라서 말이에요. 사실 저는 집 안 문 뒤에 숨어 있었는데 말이죠.”
이 기억 속에서 우리는 소년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으리라고 판단 할 수 있다.
‘인생이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듦으로써 주의를 끄는 것이다. 안전을 획득하는 방법은 남을 속이는 일이다. 나는 그다지 주목받고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들 수는 있다.’
그 아이의 야뇨증도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끌기 위해서 자주 이용되는 수단이었다. 게다가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일을 걱정하고 신경질적이 됨으로써 그의 인생 해석을 확증해 주고 있었다.
앞에 들었던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이 소년 또한 너무 이른 시기에 외부 세계가 위험에 꽉 차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위해 걱정을 하고 있는 순간에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는 이런 방법에 의해서만 자기가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번째로, 서른다섯 살인 어떤 부인의 최초 기억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세 살 때 지하실에 내려갔습니다. 내가 아주 캄캄한 계단 위에 있었을 때 나보다 몇 살 위인 사촌 남자아이가 문을 열고 내 뒤를 따라 내려왔죠. 나는 그를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기억에서 추측할 수 있는 점은 그녀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남자와 함께 있을 때 특히 불안을 느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녀가 외톨이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그녀는 서른다섯 살의 독신이었다.
“어머니가 나에게 동생이 타고 있는 유모차를 밀게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하는 기억을 살펴보면 보다 높은 사회 감정이 그녀의 몸에 익혀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과 있을 때에만 안심한다는 점과 어머니에 대한 의존적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새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아기를 돌보는 과정에서 손위 아이들의 협력을 구하고 관심을 기울이게 하며, 아기를 돌보는 책임을 나누어 주는 일은 매우 흔하다. 만약 그들의 협력을 구할 수 있다면, 그들은 아기에게 기울여진 주의 때문에 그들 자신의 중요성이 감소되었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바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참된 관심을 증명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다섯 번째로, 한 소녀는 최초의 기억에 대해 “나는 언니와 두 명의 여자 친구와 함께 놀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는 확실히 사교적으로 보이고자 노력하는 소녀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녀가 두려움에 가득 차 “나는 혼자서 살 수 있을지 그것이 가장 두려워요”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녀의 노력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었다.
독립심의 결여라는 징후가 보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에 부여하는 의미가 발견되고 이해되는 일은 그의 전 인격을 아는 열쇠가 된다. 간혹 사람의 성격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상황을 이해하는 올바른 열쇠를 곧바로 발견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주장되는 말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최초의 오류를 발견하는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 잘못 인식된 의미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생에 대해 보다 협동적이며 보다 용기 있는 대처 방식을 훈련해야 한다. 협동이야말로 신경증적 경향의 발달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협동하는 일에 대해 훈련받고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자기와 같은 또래의 아이들 사이에서 공통 과제와 공통 놀이를 통해 자신의 길을 발견해 내도록 해야만 한다.
협동을 배우는 일이 방해를 받게 되면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응석받이로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을 배워 버린 아이는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태로 학교에 다니게 된다. 이런 아이가 교과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단지 선생님의 관심을 끌게 될 거라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일에만 귀를 기울인다.
성인이 되어 사회 감정을 기르는 데 실패한 그 아이는 점점 더 확실한 잘못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최초의 심각한 과오를 범하게 되면 책임과 독립에 대해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일을 그만둬 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는 인생의 어떠한 훈련에 대해서도 거의 대처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제 와서 그들의 여러 가지 결함을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가 여러 가지 결과를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의 모든 결함을 고치기 위한 도움을 주는 일뿐이다.
한 번도 지리를 배운 적이 없는 아이가 시험지에 잘 정리된 답을 적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협동 훈련이 안 된 아이에게 이미 훈련받았음을 전제로 하는 과제를 제시한 뒤 올바른 해답을 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교사나 부모가 인생에 의미를 부여할 때 저지르기 쉬운 과오를 이해하고 그들 자신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관심이 결여되어 있는 아이들이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또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노력을 계속하도록 돕는 일이 가능해진다.
만일 그러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문제 상황에서 안이한 출구 탐색하기, 도망쳐 버리기, 무거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기, 특별한 동정 구하기, 굴욕을 받았다고 느끼면 복수하기 등의 행동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도대체 인생이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지?’ ‘내가 인생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지?’라는 자문을 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렇게 말하는 경우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과제이며 우리는 거기에 대처할 수 있다. 우리는 행동의 주인이다. 낡은 것이 변화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면 그 일을 수행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만약 인생이 이런 식으로 자립적인 인간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인간 사회의 진보에서 한계점이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