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아들러의 어린 시절
아들러는 1870년 2월 7일 오스트리아 빈 인근에 있는 루돌프샤인(Rudolfschein)에서 헝가리계 유대인으로 4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곡물상으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아들러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 구루병, 질식, 발작, 폐렴과 같은 질병을 비롯해 수레에 치이기도 하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또 어린 시절 한 침대를 쓰던 남동생이 밤사이 죽은 것을 보는 충격적인 경험도 했다. 이렇듯 의사가 되겠다는 아들러의 결심은 자연스럽게 싹이 텄다.
한 번은 그가 폐렴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켜 의사의 왕진을 받게 되었을 때, 그 의사가 아버지에게 “아이가 살 가망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아들러는 이때 자신은 그와 같은 비인간적인 의사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한편 재능이 뛰어난 형과의 갈등이나, 나중에 태어난 동생들에게 어머니의 관심이 급격히 옮겨 가는 경험은 추후 아들러의 정신분석학 이론 정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몸이 약한 아들러에게 과잉보호에 가까운 관심을 쏟다가 동생이 태어나자 그 커다란 애정이 줄어들었으니, 아들러가 느낀 상실감은 더욱 배가되었던 듯하다. 이후 아들러는 아버지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
아들러는 몸이 약했기에 은연중에 신체적인 열등감을 갖게 되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꾸준하고 체계적인 운동을 하며 힘을 길러 다른 친구들이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학업에 있어서도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해 한 선생님은 아들러의 아버지에게 구두 제조하는 일을 시켜 볼 것을 조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이 사실에 대해서도 역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어린 시절 부정적인 일을 반복적으로 겪었음에도, 의기소침하게 자신감을 잃는 대신 오히려 인생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빈 대학교에 진학한 아들러는 의학을 전공하면서 심리학,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의 강의에도 출석하며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하였다. 전공 가운데는 특히 병리해부학에 흥미를 보였다.
그는 사회 문제나 사회적 위치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 가난한 급우의 숙제를 도와주거나 그들 집을 방문함으로써 사회적 제반 문제에 관한 적절한 경험도 쌓았다.
1895년 의사 시험에 통과한 아들러는 빈 병원에서 일하다가 1898년에 안과 전문의로 개업한다.
환자를 인격적으로 이해한 의사
아들러는 환자를 하나의 증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병의 증상을 결코 별개로 생각하지 않고 늘 인격 전체로 이해하려고 했다. 또한 정신적 과정과 신체적 과정 사이에 있는 깊은 연관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중금속을 응용해서 암을 치료하고자 연구하기도 했다. 언젠가 당뇨병 환자를 치료하면서 속수무책이었던 체험이 아들러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저 환자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죽음에 관한 무력감은 아들러를 몹시 괴롭혔다. 그로 인해 아들러는 일반 개업을 그만두고, 보다 원조 가능한 치료 분야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고 신경학으로 전향하였다.
아들러는 바쁜 생활 가운데서도 다른 분야에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심리학과 철학 연구를 계속하는 동시에 사회과학에도 눈을 돌려, 인간을 전 인격적으로 이해하여 그 정신적·육체적 동일성과 사회적인 존재 양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사람의 개성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인간의 정신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러면서 아들러는 자연스럽게 정신의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마침내 신경학자이자 정신의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아들러의 훌륭한 진단과 뛰어난 치료 능력은 그의 이름을 널리 알려, 많은 나라의 환자들이 아들러의 치료를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들러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한 가운데 사교적인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표정은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그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으며 가족들과의 관계도 매우 친밀했다. 아들러는 이러한 자신의 노력으로 옛날 자기가 느꼈던 불안을 과보상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들러는 학문에 매진하는 가운데서도 가족, 친구, 일 사이의 균형을 조화로이 해 ‘사람’의 의미를 잊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참전한 일도 그의 사회적 책임 의식과 인류애를 확장시켜 주었다.
정신과 의사가 된 아들러가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 의식을 주장하고, 인간을 구분하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며 해결책을 찾은 것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승화시킨 까닭이다. 아들러가 국제적인 명성을 높게 얻은 가장 중요한 이유라 하겠다.
아들러의 결혼과 프로이트와의 인연
19세기가 끝나 갈 무렵 아들러의 삶에는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는 결혼이고, 다른 하나는 프로이트를 만난 일이었다.
아들러의 아내는 라이사 엡스타인(Raissa Epstein)으로 당시의 소련에서 빈으로 유학 온 총명하고 열정적인 학생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해는 아들러가 26세의 나이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2년 뒤인 1897년이다. 라이사는 지적이며 자의식이 분명한 여성으로 아들러의 삶과 사상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902년에는 드디어 프로이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아들러가 프로이트의 『꿈의 분석』을 서평한 것을 계기로,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는 수요일 토론 모임인 〈빈 정신분석학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프로이트의 학설에 흥미를 느꼈던 아들러는 프로이트 초기 학파의 일원이 되어 학회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하고 프로이트 심리학파의 잡지 편집진에도 참가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로써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이후 10여 년간 활동하지만, 아들러는 초창기부터 프로이트와 많은 점에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성(性) 충동을 인간 행동의 근원으로 파악하였고, 아들러는 이를 모든 인간에 대해 일률적으로 적용시킨 데 대해 반박하였다. 아들러는 그러한 증상들은 절대적인 요인이 아니라, 개인적인 상황, 경험, 갈등 속에서 빚어진 부분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졌다.
아들러는 인간이 성적 동기보다 사회적 동기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짓는 것은 열등감과 무력감이라고 보았다. 열등감과 우월감은 아들러에 의해 최초로 사용된 용어로써, 그는 이 두 감정이 인간존재에 보편적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에게는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으며 이를 보상 또는 극복해 남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의 움직임이 우리를 행동하게 만드는 추진력으로써, 아들러는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하였다. 아들러는 과거의 경험이 그의 미래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을 부정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열등성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았다. 아들러가 열등감과 우월감에 관심을 갖게 된 한 계기는 앞서 밝혔듯,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질환에 따른 육체적 불편함과 형과의 갈등에 기인한다.
아들러는 성 충동을 중시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에 반대하여 점차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변하였고, 그로 인해서 수회에 걸친 심각한 토론을 벌이기에 이른다. ‘프로이트의 정신적 생활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한 일련의 강의에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한 아들러는, 1911년 8명의 다른 멤버와 함께 이의서를 제출하고 프로이트 학회에서 탈퇴한다.
두 사람의 학설에 관심을 가졌던 융은 그들의 결별이 두 심리학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인생관 사이에 거리가 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적대적 태도와 아들러의 호의적인 태도 역시도 둘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하겠다.
이후 아들러는 8명의 회원과 함께 〈자유정신분석학회〉를 결성했다가 1912년 그 명칭을 〈개인심리학회〉로 변경했다. 이 연구 활동의 결과물로 저서 『신경증 기질(The Neurotic Constitution)』을 발표하였으며 1914년에는 《국제 개인심리학》 잡지를 창간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여 빈을 중심으로 한 전문 진료소를 22곳이나 열고 그 자신의 이론을 실천하기 위한 실험학교도 개설하였으나, 아들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32년 강제 폐쇄되었다.